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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캔디루트 38




 록시는 한손으로 귀 뒤쪽에 있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로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다. 

 존이 늦진 않았지만, 록시는 그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졌다. 기다리는 것은 무지하게 적절하고 동시에 짜증나는 일이기도 하다. 존의 방문을 위해 청소를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집안을 돌아다니며 그의 시각으로 모든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떠난 이후 바뀐 것들. 그대로 있었던 것들.


 그녀는 언젠가 그들이 다시 면대면으로 대화할 순간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들 앞에 놓여진 광활한 시간의 폭도 있고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크가 "친절히" 방문을 와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존을 볼 의향이 있냐고 물었을 때 록시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만날 의향이 있었지만, 제이크는 제인의 "경계하는 눈초리"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선 이와 같은 터무니없고 은밀한 모임들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이 그냥 방문해도 괜찮다고, 제인이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해두지 않았다고, 그리고 단지 가족을 보고 싶어했다는 이유로 그를 감옥에 집어넣지 않을 것이라고 제이크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피곤할 정도의 확신이 필요했다. 재회의 날이 다가온 오늘, 록시는 그저 그것이 빨리 진행되었으면 할 뿐이다.


 노크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는 참던 숨을 내뱉고, 너무 길어져버린 앞머리를 휘날리며 문을 열러 간다.


 존은 그녀가 기억했던 것 보다 근육질이지만, 본인의 체구를 더 작아보이게 하려는 것처럼 움츠려 있다. 세상에, 이게 또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상황이면 안되는데. 그녀는 사과를 받을 준비는 되어 있지만, 존의 뉘우침은 늘 반복적이었고,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떠나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 전까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연민에는 한계가 있었다.


록시: ㅎㅇ 존 

록시: 오랜만이네


 존은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를 보고 웃는다. 그는 인사로 공기 중으로 손을 한번 휙 내저으며 손목을 꺾는다. 상스럽기보단 수줍고 소년미있게 보이는 손짓이다. 좋은 신호이다. 어쩌면 그녀의 장난스럽고 캐주얼한 접근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그 접근이 그녀가 가진 최선의 수단이니, 그렇다면 다행일 것이다.


 록시는 자신의 손으로 동작을 따라하고선 그가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선다.


록시: 자 그럼 이제 친구

록시: 거실로 가는 길은 알고 있다고 믿는데

존: 그래, 맞아.

존: 고마워.


 그는 헛기침을 하고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따라간다. 그녀는 그보다 조금 뒤에서 따라 걸으며 그녀가 그가 쳐다보리라 예상한 사물들에 그의 시선이 멈칫하는 것을 관찰한다- 스카프가 잔뜩 걸려 있는 외투걸이, 가족 사진들이 걸린 벽, 체스 인간들이 만들어준, 존이 항상 "걔네 치곤 이상하게 성적이다"라고 했었던 멋진 조각상. 존은 지금은 조각상을 거의 잊혀진 꿈에서 본 것처럼 쳐다본다. 록시는 한숨을 쉰다.


존: 바보처럼 빤히 쳐다봐서 미안.

존: 그….

존: 우리 아빠 옛날 집에 다시 산다는 거에 대해서 지난 일주일간 기분이 좀 이상했다가 거기서 막 벗어나는 중이었는데.

존: 여기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어색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나봐.

존: 향수가 훅 치고 들어온달까,

록시: 어 이해는 돼


 그녀는 적당한 공간을 둔 채 그를 마주보고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그는 그녀 너머를 본다. 그의 시선은 자주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관통하는 듯하기도 하다. 그녀는 그를 잘 알기에 그가 무엇을 말 없이 궁금해하는지도 알고 있다.


록시: 혹시 궁금했을까 해서 그런데 해리 앤더슨은 지금 없어

록시: 나중에 집으로 돌아올텐데, 어색한 구-가족 대화 1탄만 버티면 해리가 돌아와서 같이 2탄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줄게.

존: 아, 그래.

존: 걔를 봤으면 하는데, 혹시…

존: 혹시 너희 둘 다 괜찮다면.

록시: 마자 이야기해봤어

록시: 근데 아까 말했다시피

록시: 한 번에 한 개씩

록시: 우리 이 에그버트/라론드 별거라는 반창고를 바로 존나게 잡아 뜯고 그 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는 건 어때


 존은 웃는다. 웃음에는 따뜻한 불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록시는 그가 진짜로 웃게끔 즉시 부채질을 하고 싶지만, 그녀는 이제 그의 행복을 책임지는 일이 그녀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건 수 년 전 그녀가 포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를 웃게 하고 싶다는 감정? 그 감정은 언제나 그랬듯이 생생하다.


존: 좋은 생각이야.

존: 그래서, 음.

존: 최근에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존: 몇 가지를 깨달았어.

존: 어떤 건 너를 포함하고 어떤 건 그렇지 않지만, 다 네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존: 휴

존: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생각해보자…

존: 제이크가 제인을 떠난 사건 있지?

존: 그게, 네가 안다고 가정할 때.

존: 그래도, 음, 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제인한테서 들으면 이야기가 좀….

존: 왜곡되었지.

록시: 아 ㅋㅋㅋ 아니 나 제인한테서 들은거 아냐

록시: 해리 앤더슨이 아이들만의 소통망으로 들어온 것을 알려줬지

존: 아!

존: 너희 안….

존: 아니야.

존: 미안, 내가 벌린 일에 대해서 사과하려고 왔는데, 네 사생활에 간섭하려는게 아니라

존: 네가 싫다면 제인 이야기는 안해도 괜찮아.


록시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녀는 아직까지 제인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해 자기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가는 중이지만, 사실 존이 이를 토론하기에 나쁜 대화 상대는 아니다. 처음으로 그가 그녀와 진실된 대화를 시도하려 하고 있다면, 중간 지점에서 만나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록시: 제인과 난 최근에 그닥 연락하고 지내지 않아서

존: 아

존: 정치가 우정을 갈라놓지 않는다였나 그건 어떻게 된거야?

록시: ㅋㅋ음 가끔은 정치가 어떠한 친구들을 선호하는지를 명확하게 밝히더라고

록시: 어떤 친구들을 싫어하는지 말야

록시: 그리고 모르겠어 청소년기때 좋아하던 사람들이 커서 보면 개새끼인 경우들이 있잖아!!

록시: 내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는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그냥 매달리고 있었던 것 같아.

록시: 좋은 친구 로랄

록시: 겁나 평범하지

록시: 친구들과 어울리는걸 정말 잘해

록시: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한가지에 매달리고 있으니까 다른 일들을 놓치게 되더라구

록시: 너도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

존: 하하, 그건 그렇지 뭐

록시: 아무튼

록시: 내 근황으로 니 중대한 스피치를 가로막으려는건 아니어써

록시: 제이크랑 제인이 드디어 헤어지고 거기서 니가 무슨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중이었지

존: 아니야, 괜찮아!

존: 들어서 좋았어.

존: 내 할말 하고 다시 네 이야기로 돌아가도 돼, 음.

존: 근데 응, 제이크, 걔는 음…

존: 걔랑 타브로스는 이제 나와 같이 살아.

존: 나는 예견 가능한 미래를 생각해. 제인이 뭔가 난리를 피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지금까지는 이혼서류만 몇 장 날라왔지 뭐야.

존: 그녀가 제이크가 어디있는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드론 부대를 보내서 행성 밖으로 내 집을 날려버리지 않았다면, 그들을 그냥 보내겠다는 좋은 신호 같기도 하지 않아?

존: 좀 놀랍지만, 음. 좋지, 그치.

록시: 아니 제인이 요즘 좀 싸가지가 없어졌다는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근데 너도 알잖아 걔가 완전히

록시: 아예 악당은 아니자나

록시: ㅋㅋㅋㅋ

존: 그건 토론해봐야 할걸!

록시: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제인은 그냥 사람일 뿐이고 우리 결혼에서 잘못된 것들을 다 그녀한테 덮어씌우면 안되지 내가 그녀의 노예였던 것도 아니구

존: 내가 말하려는건 그게 아니야…

록시: 그래 우리가 제인에 대해서 싸우려 온건 아니지 지금

존: 맞아. 그냥 그녀 이야기를 하지 말자

록시: 웅

존: 아무튼…

존: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어.

존: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야겠지.

존: 내가 네 인생 전체를 존나 말아먹었어.

존: 여기서 양 측에 잘못이 있다고 하지 않을게. 내 잘못이야, 완전히.

존: 음, 우리 결혼이 이렇게 된 것 뿐만이 아니라, 사실 그것도 완전히 내 잘못도 맞지만,

존: 하지만 그것보다도 전에

존: 내가 엄청 크게, 근본적인 단계에서 일을 망친 것 같아 그리고 내가 한 일이-

존: 아니면, 음, 내가 하지 않은 일이-

존: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모든 멍청한 쓸데없는 것들의 시초였어.

존: 솔직히, 우리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지, 그렇지 않아?

존: 네 인생은 칼리와 함께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나는 그냥…

존: 몰라. 그냥 너한테서 그걸 뺏어버렸어.

존: 여러 사람들의 결정권들을 가져가버린 것 같아.

존: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모든게 뒷선으로 물러났지.

존: 여기의 인생들이 가졌거나 가지지 못한 우주적 의미나, 내가 만든 의미없는 고통들은 모두 다… 비인간적이지. 그리고-

록시: 오 아니 거기서 잠시만 멈춰 야


 그녀는 그의 말을 끊은 것에 대해 조금 미안함을 느낀다. 그들이 둘을 위해 만든 이 대화공간은 약한 신뢰 위에 조심스레 균형을 이루고 있고, 그녀는 그를 내쫓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장황한 발화가 몸 속에 쌓여 있는 것이 느껴졌을 뿐이다. 길고 긴 주저리를 통해 쏟아져 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말들은 솔직히 그냥. 개소리일 것이다. 그녀는 존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고, 원치 않는다면 평화를 위해 상대의 말을 맹신할 필요도 없다.


록시: 미안해 존 사랑하는데 이건 좀 많이 헛소리다

존: 뭐?!


 존의 시선은 정확히 그녀의 얼굴로 이동한다. 어쩌면 문 앞에 서있던 순간 이후로 처음일 수 도 있다. 그녀의 어깨를 따라 닭살이 돋지만, 그녀의 분노로부터 정신이 흐트러지게 두지 않는다.


록시: 내 말은 그게 바보같은 감정놀이라는거야!!

록시: 넌 니 선택이 너무 중요해서 다른 어느 누구의 선택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록시: 그리고 나선 머야

록시: 니가 원하던걸 얻었어?

록시: 니 인생이 끝나서 점수를 합산해봤더니 니가 1등을 하거나 했다는거야?

록시: 내가 보기엔 우리 아직도 살아움직이고 있는 것 같던데

록시: 그리고 니가 전혀 우승하고 있어보이지 않는데 니가 사과할 이유라는 그 엄청난 일들은 뭔데?

록시: 그리고 젠장 말하는 김에 말야!! 

록시: 사과하면서 정작 미안해라는 말은 안했잖아!

존: 아니야, 나는 – 난 그냥 …

존: 네 인생 말아먹어서 미안해, 아니면 그렇지 않-

록시: 난 내 인생이 좋아!!!

록시: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그리고 나도 내가 좆되게 만든 일이나 실수야 있지 그렇지만 니가 뭔데 내 인생을 말아먹었다고 하는건데

록시: 아니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던가

록시: 내 껀데!


 장난스럽고 가벼운 접근은 개뿔. 그녀는 고개를 들고 눈을 응시하며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한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혹여나 시선이 이탈할까봐 눈을 깜빡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만 벌린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지만 아직도 완전히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다. 아직 벌어진 그의 입은 마침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짓는다.


록시: 어

록시: 왜 나 그렇게 쳐다봐?

존: 아니야, 미안해

존: 그냥…

존: 옛날엔 네가 진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에게 안 알려줘서 너무 화가 났었어.

존: 내가 정말 진지하게 너와 싸우고 싶다는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존: 그냥 이런 록시에 익숙해져 있지 않달까.

록시: 흠

록시: 니 가설을 니가 직접 반증한 것처럼 들리는데, 천재씨

존: 응?

록시: 우리가 결혼해 있을 동안 너는 내가 어떠했으면 하고 바랬지

록시: 근데 나는 그렇지 않아써

록시: 근데 너는 지금 인형들로만 이루어진 관객 속에서 너 혼자 진짜 소년이라고 믿고 있잖아

록시: 니가 시켰던 것처럼 나는 나대로 존재하고 있어 단지 니 도움없이 했을 뿐

록시: 시야 좀 넓혀 이사람아!!

록시: 니가 원하거나 원치 않아서 내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게 아니야

록시: 스스로를 대변하는걸 잘 못했는데 이제 배워가는 중인 거지

록시: 내 자신만의 자기자각 기차가 있다고 

록시: 넌 그저 수많은 지어지고 있는 록시가 깨닫는 것들 기차역에 도착한거야.

존: 하지만…

존: 그전에 너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

록시: 저기요

록시: 내가 “나답게” 행동한다는게 뭔지 뭐가 아닌지 결정해선 뭘 하려고 그만 좀 해

록시: 사람들이 다 똑같이 살아간다고 생각하는거야

존: 여기서 우리 삶이 뭔가… 엇나갔다고 생각한적 정말 없어?

록시: 어떻게 엇나갔다는 말인데??

존: 원래 일들이 일어나야만 하는 방식으로?

록시: 그게 무슨 뜻인데???


 존의 입이 벌어졌다 닫힌다. 그의 사고회로에 뭔가가 걸린듯하다. 록시에게 그의 머릿속에 기어가 뻑뻑하게 움직이는게 보인다. 그가 불쌍하게 여겨지려고 한다.


 록시는 잠깐 멈춰선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망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등 거짓말로 그를 안심시키고 싶진 않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그에게 탓을 덮어씌우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고, 전남편의 눈을 쳐다본 후, 그에게 진실대로 말한다.


록시: 사실 나는… 뭔가를 느끼긴 했어

록시: 근데 너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라는거야

록시: 너도 알다시피 이 게임에서 네가 유일한 플레이어였던 적은 없어

록시: 이게 막 시작했을 때 곁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 안나?

록시: 다 의미없는 헛짓거리였으면 나랑 칼리가 너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겠지

록시: 내가 과거나 미래를 통달하는 마스터 예언자였던 건 아니지만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어떻게 사건이 진행되었을지는 좀 알지

록시: 그리고 그거 아니?

록시: 나는 지금 상황이 충분히 씨발 맘에 들어

록시: 그러니까 아까운 시간을 니가 너무 특별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데 쓰지 않으면 어떨까, 모두가 완벽히 행복하지 않는게 다 니 잘못인 양


 존은 조용하다. 록시는 더 할 말이 있다, 아마. 그녀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일이 어떻게 풀렸을지에 대해 반쯤 생각해뒀지만 한번도 구체적인 단어로 풀어내본 적 없는 생각들. 그래도 한 대화 치고는 많은 진심이 나왔으므로, 그녀는 존의 무릎을 툭 치고 물을 가지러 가기 위해 부엌으로 걸어간다.


 양손에 잔을 들고 록시는 카운터에 기대서 숨을 쉰다. 아직 자신이 한 속사포같은 말을 동반한 아드레날린이 느껴지고, 이 때문에 잔에 든 물이 흔들린다. 그녀는 물결을 보고, 자신의 손을 본다. 그녀의 손에도 언젠가는 주름이 잡힐지에 대해 상상해본다.


 그녀가 다시 존 옆에 앉자, 그는 말없이 잔을 받는다. 각자 물을 마신 후, 고맙게도, 그가 입을 연다.


존: 그냥 모든 게 말이 되도록 설명하는 규칙을 계속 찾으려고 했어, 무슨 말인지 알아?

존: 그런데 어쩌면 그냥 말이 안되는 걸 수도.

록시: 완전히, 우주적으로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에서 어른이 되었다는건 알아

록시: 그래서 모든 것에서 패턴을 찾으려고 하는게 이해는 돼

록시: 근데 그렇게 깊게 해석 안 해도 돼

록시: 그리고 생각해보면

록시: 그렇게 관측하려 들면, 모든게 의도적이고 교묘한 영웅적인 디자인이라고 추측하는게

록시: 사실은 좀 가벼워

존: 아.

존: 그래, 그렇지.


 존은 기지개를 켜고, 애니 히로인처럼 뒤통수를 긁는다. 그리고는 머리가 혼란스러운 듯 웃음을 내뱉는다. 금방 끝마친 정신적 고문으로부터 온몸이 지친 듯, 표정은 축 늘어져 있지만 그는 진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다정함이 그녀의 몸을 휩싼다. 연정의 재시작이 두려워지는 그런 방식은 아니다. 그냥 그녀가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도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낡은 티셔츠를 옷장 뒷 켠에서 발견한 것과도 같은 편안함이다. 먼지 냄새가 나지만, 정신이 확 들 정도로 포근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존: 미안해. 그냥 완전히 개새끼처럼 느껴지지 않는게 가끔은 어려워서.

존: 내가 시공간을 부수는 엄청난 수상이 아닐 수 도 있겠지.

존: 하지만 캐논 타임라인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건 우리가 알긴 하잖아.

존: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나한텐 자명하고.

록시: 그래서 어쩌라구

존: “그래서 어쩌라고”???

록시: 웅

록시: 그래서 어쩌라구

록시: 누군가 임의로 “진짜” 라고 정의한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는거랑 내가 존나 무슨 상관인데

록시: 지금 내 인생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건데

록시: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한테 뭐가 있길래 이 현실이 그 현실보다 부족하다는건데

존: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지금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 안들어?

존: 마법이든 아니든, 나는 많이 다르게 행동했을 것 같아, 특히 너를 위해서라면

존: 네 곁을 지킨다던가, 아니면…. 빌어먹을.

존: 애초부터 너와 얽히지 않았던가.

존: 너랑 칼리가 하던 걸 하게 놔두거나, 뭔진 몰라도 가던 길 그대로 가게.

존: 그냥 내가 될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어, 그 ….


록시는 코를 찡그려 보인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삶들을 생각하니 어지러워 진다.


록시: 아냐 그런 말 하지 마

록시: 음 이번엔 니 사과를 받아줄텐데 그래도

록시: 당연히 상황이 얼마든지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겠지

록시: 그리고 솔찌 그때는

록시: 그녀랑 같이 있었을 땐…

록시: 그냥 내가 똑바로 일처리를 하길 원했던 것 같아

록시: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지만 ㅋㅋ

록시: 그리고 그게 아마 제일 큰 문제였겠지만 ㅋㅋㅋㅋㅋㅋ

록시: 그냥 음

록시: 인간이 될 수 있는 크고 새로운 기회가 있었는데!

록시: 내가 애초에 어떤 방식으로 나답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생각들이 서로 충돌했지

록시: 예를 들어 아름다운 해골 외계인이랑 연애한다는게 무슨 뜻일지

록시: 성 정체성 방면에서, 젠더 방면에서, 그리고 나라는 인격체 방면에서

록시: 꽤 오랜 시간 동안은 사람들이 나를 여자라고 생각하는 걸 내가 원하는지도 몰랐어

존: 아, 그건 몰랐어.

존: 음, 사실 궁금해했을 수 도?

존: 하지만 어리고 멍청한 내가 궁금해했으니, 그닥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겠다.

존: 그리고 우리가 연애했을 땐 네가 그런 고민들을 다 잊은 것 같았어.

록시: 안 잊었었어

존: 그 이야기 좀 할래…?

록시: 그때 이야기했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냥 내 정체성을 이리저리 바꾸는게 좀 부끄러웠던 것 같아

록시: 너처럼 사회가 뭐가 옳고 그른지 온갖 압박을 주며 자란건 아니었지만 말야

록시: 그래서 막 수치스럽진 않았지

록시: 우리가 막 이야기하기 시작해서 깊게 파고들지 못했던 막연한 질문들이 떠올랐어

록시: 그냥 몰겠다 이런 식으로 살아볼까 했는데 칼리랑 멀어지게 돼서

록시: 그 일에 대한 생각이 단절된건 아냐

록시: 걔에 대한 생각도 그렇고

록시: 그치만 다른 누구와도 그런 주제가 언급되지 않았고 너랑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건 불편해서 말을 안한거야

존: 그렇게 느껴서 정말 안타까워, 록시.

록시: 괜찮아 니 잘못 아니지

존: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존: 그런 삶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나랑… 결혼한게?

존: 내가 무죄라는건 아니야, 그냥 좀 놀라워서.

존: 네가 내리는 결정들을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어?

록시: 난 니가 한것처럼 시간선들의 소용돌이에 머리를 집어넣지 않아서 다른 선택권이 보인다는게 뭔지 잘 모르겠네

록시: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방법으로 처리를 해보고 일이 잘 풀리길 기도하는거지?


 록시는 그녀의 시야 바로 밖에 있는 시간과 선택의 소용돌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어지러움을 느낀다. 머릿속으로 “후회”라는 단어를 굴려본다. 입밖으로 뱉었을 때 어떨지 혀로 맛도 본다. 존은 기다린다.


록시: 난 내가 아무것도 후회할 수 없을 것 같아

록시: 나다울 수 있는 옳은 방법이 딱 하나뿐이진 않아, 내 생각엔

록시: 난 지금의 내 자신이 조아

록시: 내가 무턱대고 “사실 말이야 아싸 여자인게 너무 좋아 여자가 해야 마땅한 일들 다 내가 해야지” 라고 한건 아니잖아

록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마 그렇겠지, 이해는 하지만 난 그런거 신경 안써

록시: 미안 ㅋㅋㅋㅋ 내 뇌 속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하는 그런걸 잘 못해서


 존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록시는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가진다. 처음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때 얼마나 헷갈렸는지 기억한다. 젠더가 어떻게 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의 법칙이 쓸모없다는 식의 막연한 진리는 있었다만 그녀는 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임신을 하기 전까지 잠깐 이러한 생각을 접어뒀었다 – 그리고는 아이를 가지는 것이 그녀가 억누르고 있었던 깊은 고뇌에 대한 확답을 줄 것만 같아서 두려워했었다. 그때는 그 고뇌를 벗어나기엔 너무 늦었겠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뇌의 자리에는 임신에 대한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확신뿐이었다. 그녀가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의 기쁨이었다. 그녀는 이때까지 이보다 여성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때 그녀는 그녀의 몸을 구체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전히 그녀의 것. 사람을 만들기 위해 조각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살점 기계. 여태껏 어떻게 느껴야 할지 잘 모르겠던 그녀의 가슴도 갑자기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기능이 생겼다. 젠더라는 개념 자체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그녀의 몸으로 다른 하나의 몸을 만들 수 있다는 육체적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너무나 인간다운 리듬으로 뛰는 두 심장.


 그녀는 이를 어떻게 존에게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개인적이며 뒤얽힌 이 이야기를 그녀가 있는 그대로 완벽히 풀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해리 앤더슨은 그의 자식이기도 하기에, 그녀는 시도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안다.


록시: ㅁㄹ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은 해리 앤더슨을 만들어 냈어

록시: 개인적으로는 다른 어떤 것보다 그게 중요해서

록시: 글고 젠더에 관한건 아예 그만 생각한게 아니기도 하고

록시: 내가 원래 하려는 방식과는 좀 다른 수단을 찾았을

록시: 나는…


 그녀의 중대하고 애매한 생각들을 단어로 함축해서 표현하자니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고,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오는게 느껴진다. 존까지 눈물을 흘리기 전에 그녀는 고개를 젓고 웃는다.


록시: 하지만 ㅋㅋ 존 우리는 그냥 어른일 뿐이야

록시: 우린 아직 살아있지!

록시: 몰라 우린 어디보자… 평범한 인간 나이로 하면 이제 겨우 중년인걸?

록시: 생각을 정리하는덴 가설일 뿐이지만 아마도 영원한 시간을 가지고 있어

록시: 존나 그 어느 누가 알까

록시: 23살에 내가 누구인지를 깨우치고 남은 인생 동안은 뒷짐지고 세상이 돌아가는 걸 바라만 보고 있진 않잖아

록시: 음 사실 지금까지 너한텐 그랬을 수 있겠네

존: 하하. 아야.

록시: 난 그냥 내가 록시의 자기자각 열차역들을 짓는게 끝난 것 같지 않아서

록시: 몇 개가 더 공사를 위해 대기 중인지 누가 알아

록시: 니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록시: 인생을 우주적으로 무의미하고 막다른 실패의 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야

존: 그런거겠지…

존: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남은게 없구나.

존: 꼭 그래야만 하는게 아니라면 이런 빌어먹을 재수없는 놈이 되지 않는 편이 낫겠네.

록시: 그래 그렇지

록시: 우리 앞에 천만개의 인생이 남아있어 존

록시: 망쳐 놓을 길이 앞으로 몇 개가 있을지 알 방법도 없어!!

록시: 좀 감명을 받니??!

존: 정말…

존: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감명 깊어, 록시.


 둘 다 웃음을 짓는다. 이전보다 더 따뜻하고 진짜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지나간 세월과 사라진 압박 덕분이겠지만, 그녀는 너무 깊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함께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이 충분하게 느껴진다.


존: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해주고, 믿어줘서 고마워.

존: 부분적으로는 나 교육시키려고 말한거 아는데, 그래도 네가 이런 이야기는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닌걸 아니까.

록시: 사실 나도 이런 생각들 참 오랜만이야

록시: 몇 년에 한번씩 스쳐가는 대신 너한테 직접 말할 수 있게 기회를 줘서 고마워

존: 가끔씩은 같은 말을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듣고 또 들어야지 뭐.

존: 나 방금 스스로를 엿먹인거야 참고로.

록시: ㅋㅋㅋㅋ우리 그 반창고들을 확확 잡아 뜯고 있네 지금  

록시: 가족 상담 전문가 둘이 납셨어

존: 그래, 나도 우리가 이걸 너무 끝내주게 잘해서 솔직히 좀 이상하네.

존: 결혼 실패하고 있었을 때 이렇게 좀 해결할걸.

록시: 수 많은 갈등들 밑에 숨겨져 있었겠지, 아마

존: 음, 한번쯤은 이렇게 몇 개 들추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네.

록시: 앞으로 300년간 홀로 감옥살이하는 것처럼 지내는 것 대신 원한다면 나랑 소통해도 조아


존은 끄덕이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문이 열린다.


 해리 앤더슨은 눈물을 글썽이며 웃고 있는 둘을 보고 어깨 위쪽으로 가방을 고쳐맨다. 록시는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아름다운, 똑똑한 아들. 달려가서 그를 안아주고 싶다,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이 그에게 줄 고통에 대비해서.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이에 대한 농담을 많이 하는 그였지만, 해리가 얼마나 이걸 원했는지 알고 있다.


 그녀는 다시 존을 보고 그녀의 표정이 그의 얼굴에 거울처럼 똑같이 비친 것을 본다. 그녀는 그가 울지 않기를 빈다, 아까처럼 스스로를 탓하며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를. 하지만 지난 한 시간 동안의 대화가 뭔가를 바꾼듯 하다. 존은 일어서서 청바지에 손을 슥 닦고, 아들을 향해 허리를 피고 걷는다.


존: 안녕 해리 앤더슨.

존: 너를 봐서 정말, 정말 좋구나.

존: 같이 드라이브나 갈까?


해리 앤더슨은 어금니를 몇 번 더 깨물지만, 그가 마침내 지은 미소는 진정어린 미소였다.


해리 앤더슨: 네, 아빠.

해리 앤더슨: 그러면 좋겠네요.